Inje-gun, Gangwon State, South Korea
time : Dec 22, 2024 9:46 AM
duration : 7h 4m 15s
distance : 12.6 km
total_ascent : 1055 m
highest_point : 1509 m
avg_speed : 2.0 km/h
user_id : bethewise
user_firstname : 상복
user_lastname : 박
동서울 터미널을 출발한 지 두 시간 만에 장수대에 도착했다. 동지를 갓 지난 차가운 겨울 바람이 훅 하고 콧속으로 파고든다. 산 능선 부위에 방금 올라온 햇살이 붉게 비치고 하늘은 파란 물감을 부어 놓은 듯 맑기만 하다. 오늘은 대승령을 넘어 십이선텨탕으로 하산할 계획이니 시간상 여유가 있다.
장수대는 오색, 한계령과 함께 설악산 서북능선으로 오를 수 있는 주요 들머리이다. 1959년 제3군단 오덕진 장군이 이곳에 약 100평 규모의 산장을 짓고 6.25때 이 서부전선에서 산화한 전몰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장수대 (將帥臺)라 명명한 이후 이곳 지명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이 장수대는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으로도 사용되었다.
대승폭포(大乘瀑布)
엊그제 내린 눈이 들머리 입구까지 가볍게 쌓여 있다. 우리는 버스정류장에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대승폭포로 오르는 계단을 한발 한발 오를 때마다 맞은편에 우뚝 솟은 가리봉이 햇빛의 역광을 받아 검은 빛으로 비치고, 설악산 서북능선 길에는 하얀 상고대가 화려하게 빛난다.
장수대에서 900 여 미터 계단을 오르면 개성의 송악산 박연폭포(朴淵瀑布) 그리고 금강산의 구룡폭포(九龍瀑浦)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중 하나라고 하는 대승폭포(大乘瀑布) 전망대에 이른다. 폭포의 높이가 88미터라고 하는데 비가 내린 다음날에 가면 거대한 물줄기가 쉼 없이 쏟아지는 광경을 보면 굉장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더구나 옛 사람들이 쓴 시를 보면 그 폭포에 가까이 다가가서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정말 그런 장관을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 하지만 지금은 폭포의 일부가 얼어붙어 있고 또 이렇게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한낱 화강암 벽 위에 검은 빛 물자국이 나 있는 절벽일 따름이다.
대승령(大乘嶺)
100 년은 더 되었을 법 싶은 전나무 숲을 지나며 우리는 생명(生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인돌 형님의 지인께서 80이 넘으셨는데 낙상 사고를 당하셨을 때 무척 걱정을 했지만 다시 회복하여 글도 쓰고 모임에도 나오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노인이 되면 손자 손녀 보는 재미로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고 하였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 소망이겠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소망을 이룬 사람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근래 세계적인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 등 수 많은 회사에서는 바이오 산업에 투자하여 앞으로 인류가 병 없이 오래 사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이제는 불로장생을 개인이 아니라 기업에서 실현시키려 하는 것이다.
고인돌 형님은 최근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새끼 맘모스에서 채취한 유전자를 이용하여 코끼리의 난자에 체세포를 이식하는 방법으로 맘모스를 복원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라고 하며, 비록 사람이 죽더라도 이렇게 체세포나 정자 등을 보관했다가 다시 생명체로 부활시킬 수 있다든가 머리를 이식한다든가 아니면 칩을 이용하여 나의 생각과 지식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방식으로 부활할 수 있을 거라고 하신다. 공상만화 같은 이야기다.
나는 T.S. Eliot의 시 황무지에 나오는 무녀(巫女) Cumae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폴론 신은 그의 신전을 지키는 무녀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하자, 무녀는 모래를 한줌 쥐고 이 손 안에 있는 모래알만큼 오래 살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녀는 늙어서 주름이 늘어나고 몸은 쪼그라들었다. 나중에는 몸이 하도 작아 작은 항아리 속에 들어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녀는 빨리 죽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죽을 수가 없었고 마침내 항아리가 텅 비었어도 사람들이 묻는 말에 그녀는 ‘내 소원은 빨리 죽는 것이야’라고 메아리처럼 중얼거렸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런 생명을 무한대로 연장하고자 하는 헛된 꿈을 갖는 것보다 살아있는 동안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비록 각 개인의 생명은 죽음으로 인해 끝나겠지만, 그의 유전자는 살아남아서 대대손손 이어질 터이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도 좋으리라.
느릿함 발걸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돌계단을 오르니 옛날 대승암이라는 절이 있던 ‘대승암터’를 지난다. 머리위에는 벌써 햇볕에 녹은 상고대가 바람에 날린다. 마음은 더욱 급해진다.
내가 처음 대승령에 왔을 때 그 이름을 듣고 어느 전쟁을 상상하였다. 장수대와 가까운 곳에 있으니 무슨 전쟁에서 대승(大勝)을 거둬 그 기념으로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대승암(大乘庵)이라는 절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불교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추측하였다. 더구나 이 대승령은 백담사와 이어주는 고개이니 말이다.
이 대승령은 큰 수레라는 뜻의 대승불교에서 나온 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크게 깨우친 것을 바탕으로 대중들에게 설볍하여 함께 잘 살고자 하는 것이 대승불교이며 그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하니, 이 대승령의 뜻도 고개를 넘어 두루두루 중생을 선도하고자 하는 선인들의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大韓民國)
머리위에는 상고대가 피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능선 길에는 하얀 눈이 발목을 덮는다. 옆이 트인 곳을 지날 때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댄다. 아이젠과 스패치 그리고 따뜻한 옷과 모자 등으로 완전 무장을 하였기에 몸을 뚫고 들어올 수 없는 찬 바람은 휘 한 바퀴 돌며 나무에 얹힌 상고대 눈 가루를 날리고 달아난다.
대한민국봉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상고대로 하얗게 덮인 서북능선 끝에 귀때기청봉이 우뚝 서 있고 그 너머에는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과 중청봉이 보인다. 그리고 동해바다와 그 사이 산줄기가 물결처럼 출렁인다. 봄에는 예쁜 진홍빛 꽃을 피웠을 털진달래는 하얀 얼음으로 덕지덕지 몸을 감싸고 있다. 봄 여름 예쁜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운 안산(鞍山)도 지금은 눈꽃으로 덮여 있다. 실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남한의 최 북방 향로봉이 보인다. 그 주변 어느 봉우리 어느 산줄기는 분명 북한 땅이리라.
진귀한 풍경을 오래 서서 보고 싶지만 세찬 바람이 자꾸 등을 떠민다. 사진을 찍는 손이 얼얼하다. 멋진 풍경을 동영상까지 찍고 후다닥 봉우리에서 한 발짝 내려서니 바람이 잔다. 안산 삼거리 가기 전 공터 눈밭에 의자를 꺼내 앉아 점심을 먹었다.
십이선녀탕 계곡
이 계곡 길은 겨울 한철 사람들의 통행이 아주 드문 길이다. 눈 위에 희미한 발자국 서너 개뿐이다. 사방은 고요하고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눈이 내리면 먹을 것을 찾지 못하는 새들은 모두 마을로 내려갔을 거라고 한다.
안산 삼거리에서 십이선녀탕 계곡 입구까지 약 7 킬로미터다. 내리막 길이니 힘은 들지 않지만 눈길이라 조심스럽다. 수억 년을 그랬던 것처럼 바위를 깎아대며 물을 쏟아내던 폭포는 겨울잠을 자고 있다. 얼마전까지 물이 떨어지던 못에는 작은 숨구멍만 남겨 놓고 모두 얼어 버렸다.
누구는 12개의 폭포가 있다 하고 누구는 8개 밖에 없다고 하지만 이 긴 계곡에는 크고 작은 폭포와 담이 수두룩하게 늘어서 있으니 보는 이에 따라서 4개일 수도 있겠고 또 20개일 수도 있겠다. 다만 아름다운 선녀들이 밤에 선계에서 몰래 내려와 목욕을 하고 올라간다는 그런 전설에 따라 십이선녀탕이라는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4시 50분이 되어 산행을 마쳤다. 계곡 입구 식당은 문을 닫았고 마당에 늘어선 식탁 위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동짓달 짧은 해는 벌써 산 너머로 내려갔는지 높은 산등성이만 황금빛 햇빛이 너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