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nju-si, Gangwon State, South Korea
time : Nov 3, 2024 9:15 AM
duration : 6h 47m 10s
distance : 58.8 km
total_ascent : 378 m
highest_point : 151 m
avg_speed : 12.5 km/h
user_id : bethewise
user_firstname : 상복
user_lastname : 박
여행은 자기가 살고 있는 눈에 익숙한 공간을 떠나 낯선 곳을 찾아다니며 낯선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행은 집을 떠나면서 시작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말한다.
여행이란 자기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을 떠나 아득한 과거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옛날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을 만나보고 그들의 삶을 느껴보는 것이다. 또한 여행이란 이 현재의 순간을 떠나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시간에 들러 보는 것이다.
반계리 은행나무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한반도에서 패권을 휘두르던 통일신라의 기운이 약해지고 그 땅에 후삼국의 맹주들이 태동하다가 마침내 왕건이라는 사람이 그들을 잠재우고 패권을 잡아 고려를 건국하던 시기. 고려의 건국은 서기 918년. 그가 후백제의 견훤을 꺾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며, 궁예를 굴복시키는 일은 더욱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 시기 왕건이 불교의 힘을 배경으로 고려를 세우던 때 심었을 것이라는 반계리 은행나무의 수령은 그래서 천 년쯤 될 것이라고 한다. 그때부터 줄곧 그 자리에 서서 고려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고 조선의 500년 역사를 함께 겪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암울하고 춥고 배고팠던 일제의 식민지 시기를 지나왔고 6.25 전쟁도 무사히 넘겨온 그 반계리 은행나무를 보러 갔다.
지름은 40여미터쯤 되어 보이고 높이도 3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인다. 이 나무를 보기 위해 끝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의 정제되지 않은 행동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년의 무게로 흔들리지도 않는다. 일년 내내 찾아보지도 않다가 가을 한철 단풍 드는 그 짧은 시기에만 몰려와 아우성치고 썰물처럼 싹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무정함도 탓하지 않는다.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내년에 또 오라거나 말라거나 아무런 표정도 없이 무덤덤하게 서서 찾아왔던 사람들을 배웅한다.
흥법사지 (興法寺址)
반계리 은행나무를 본 후 흥법사지로 달려가 진공대사의 탑비와 3층석탑을 구경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의 선생님 (왕사(王師))로서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진공대사의 생애와 훌륭한 모습을 글로 표현해 놓았다는 탑신(塔身)은 왜구들이 훔쳐가다가 죽령에서 땅에 떨어트리는 바람에 깨진 채 방치되었다가 현재는 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였다.
지금은 추수가 끝난 빈 들판 한 가운데 석탑 하나 그리고 탑신이 없는 진공대사의 탑비 기단부(귀부)와 머리(이수)만 남아 있다. 주변 밭에 출입을 제한하는 금줄이 쳐져 있고 일부 땅이 파헤쳐져 있어 최근 발굴작업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공대사는 속명이 충담이며 신라의 고승으로서 당나라에 유학을 떠났다가 고려가 건국되던 해인 918년 돌아와 왕건의 왕사로 활동하다가 940년에 입적하였다고 한다. 그가 죽자 왕건은 몸소 그의 탑비 비문을 썼고 그 비문을 당태종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만큼 고려 태조 왕건의 진공대사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평가한다.
흥법사는 원래 흥법선원으로 불렀는데 이는 고려가 건국되던 어지러운 시기에 불법(佛法)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을 진공대사가 주도적으로 행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통일된 고려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황학산 수목원
이런저런 먼 옛날 이야기 속에 여주로 건너가 여주 쌀밥으로 점심을 먹고 황학산 수목원을 방문하였다. 봄 여름 왕성하게 피어나던 꽃들이 다 지고 그저 가을 국화나 단풍이나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도 갖가지 꽃과 열매가 많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두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천 년 묵은 은행나무를 보러 멀리 문막까지 다녀왔지만 이제 우리나라에도 전국적으로 훌륭한 수목원이 잘 가꾸어져 있고 대로변의 가로수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 앞으로 천 년 후에는 우리의 후손들이 멀리 가지 않아도 가까운 곳에서 천 년 묵은 나무들을 맘껏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여주까지 수도권 전철이 운행되고 있어서 신분당선 이매역을 거쳐 편안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