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eun-gun, Chungcheongbuk-do, South Korea
time : Dec 29, 2024 9:39 AM
duration : 7h 3m 56s
distance : 16.5 km
total_ascent : 1475 m
highest_point : 1104 m
avg_speed : 2.5 km/h
user_id : bethewise
user_firstname : 상복
user_lastname : 박
속리산 천왕봉의 찬란한 상고대
신사역을 출발한 지 두 시간 반 만인 9시 30분에 산행 들머리인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도화리 천왕사 앞에 도착했다. 버스 기사는 차를 돌리다가 뒤쪽 범퍼를 돌무더기에 부딪혀서 부숴버렸다. 마음이 아플 텐 데도 속 좋은 운전기사는 개의치 않는 듯 웃으면서 배웅한다.
미리 받아본 오늘 산행의 등산 지도를 살펴보니 우리가 들어선 산행 들머리는 ‘도화리’라는 마을이다. 복숭아 과수원이 많아서 도화리인가? 아니면 무릉도원처럼 신선들이 숨어 살기에 적절한 마을이라서 도화리인가? 오늘 걸어갈 한남금북 지맥길은 이 도화리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접근로 왼편 능선길이다.
출발하기 전 산 위를 바라보니 하얀 상고대를 뒤집어 쓴 천왕봉이 계곡의 끝에 우뚝 솟아 있다. 천왕봉까지 2.7 km 로 그리 길지는 않다. 처음에는 계곡을 옆에 끼고 이어지는 길이 경운기 한 대는 거뜬히 달릴 만큼 넓고 잘 닦여져 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작은 계곡을 건너면서부터 산길이 시작된다. 거친 돌 길이다. 산 길의 경사가 점점 급해지고 음지에는 눈도 쌓여 있다. 아이젠을 신으면 훨씬 편해지겠지만 무슨 오기가 있는 건지 오르는 길이라며 그냥 오른다. 한 시간 정도 지난 10시 40분 도화리 안부(鞍部)에 올라섰다. 들머리에서 2.1 km 걸었고 정상인 천왕봉까지 600 미터 남은 곳이다.
천왕봉(天王峯) 상고대
도화리 안부에는 눈이 등산화 밑창을 덮을 만큼 쌓여 있다. 나뭇가지에는 하얀 얼음 꽃이 만발했다. 여기까지 거친 숨을 참으면서 올라온 보상을 받는 기분이다. 안부에서 천왕봉까지 가는 600미터는 더욱 경사가 심하다. 눈은 멥쌀 눈이라 쉽게 미끄러진다. 길 가에는 키 작은 산죽이 흰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청초하다. 천왕봉에서 이어지는 속리산 능선 동쪽 부분이 온통 상고대로 덮여 있다. 겨울 산행의 매력이 듬뿍 묻어난다.
2024년 마지막 일요일. 속리산 정상에는 우리 팀 말고도 문장대 방면에서 올라온 사람들과 어우러져 제법 북적인다. 봉우리 주변은 바다 속 산호처럼 아름다운 얼음꽃이 피어 있었다. 공기가 어찌나 맑은 지 약 4.3 km 떨어져 있는 문장대(文藏臺)가 코 앞인 듯 가까이 보이고 그 사이 길게 이어진 능선의 바위들이 하얀 얼음 꽃으로 덮여 있다.
속리산(俗離山) 우복동천(牛腹洞天)
천왕봉은 갈령으로 가는 길과 문장대로 향하는 능선길이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이고 여기서 시작되는 한남금북지맥의 시작점이다. 이름만큼이나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주변의 조망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속리산이 속해 있는 화북 화서 지역을 가리켜 소의 내장처럼 아늑하고 안전한 곳이라는 의미로 우복동천(牛腹洞天)이라 불렀다지만 그에 해당되는 지역이 단지 화북이나 화서 지역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 속리산을 두르고 있는 각 계곡 주변의 마을들을 모두 일컫는 듯 하다. 지금이야 길이 사방팔방으로 나 있어서 접근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옛날처럼 우마차를 끌고 다니던 시절에는 이 속리산 기슭에 일단 들어서면 외적의 침입을 입을 일도 없을 터이고, 각 마을 주변도 땅을 일궈 논밭을 만들기에 수월할 터이니 어디인들 우복동천이 아니었겠는가.
우리가 걷는 한남금북 정맥의 첫 구간만 하더라도 왼편으로는 삼가 저수지 주변으로 너른 평야가 자리잡고 있고 오른편으로는 낮은 산과 너른 들판이 있고 그 가운데에 법주사가 자리잡고 있다. 또 사방이 충북 알프스라 부르는 험난하 능선으로 둘러 싸여 있으니 외적의 침입을 피하기에는 이만한 지리적 요충지가 없을 듯하다.
정맥길은 지루하게 이어진다. 산은 점점 낮아져서 해발 고도 500~600 미터를 아우르는데 양지에는 눈이 다 녹아서 낙엽에 덮여 있고 음지에는 눈이 남아 있으니 천왕봉에서 착용한 아이젠을 선뜻 벗지 못한다.
전반적으로 봉우리의 높이가 낮기는 하지만 그런 구릉 같은 산 봉우리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니 몸의 피로도가 쌓여간다. 접근 도로를 포함하여 오늘 걸어야 할 총 거리가 18 킬로미터라고 하는데 10 킬로미터를 가기도 전에 몸이 힘에 부친다. 대부분 참나무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조망도 없다. 그냥 앞만 보고 넘어지지 않으려 조심조심 걸을 뿐이다.
무안 공항 비행기 사고
점심이라고 간단하게 빵과 계란을 먹고 다시 걷기를 시작하려 는데 산우 한 분이 무안 공항 비행기 사고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 얘기를 전해준 그 사람도 나도 그냥 무덤덤해 한다. 200 여명의 탑승객 중에서 두 명만 생존했다고 한다. 보통 비행기 추락 사고라면 전원 사망인데 어떻게 두 명이나 살 수 있었지? 잠시 서서 뉴스를 검색해 보고 동체 착륙이니 방호벽이니 하는 단어들이 눈에 띄었다. 새 떼가 엔진에 충돌해서 사고가 났다고도 한다. 이름도 모르는 무안 공항에서 일어난 큰 인명사고로 마음이 착잡해 진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일어난 12.3 계엄 사태도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채 탄핵이니 헌법재판소니 하는 일로 어수선한 판에 이런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으니 말이다.
어수선한 불목재 고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눈길과 낙엽길을 걷고 또 걷는다. 키가 큰 봉우리는 사면으로 비껴 이어져 수고를 덜어준다. 그렇게 걷다가 산길 안내 리본이 왼편 내리막 길로 숱하게 걸려있는 것이 보인다. 얼핏 보가 정맥길이라면 능선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앞에 있는 봉우리를 넘어야 할 것 같은데 어째서 계곡 같은 내리막 길로 이어지는 거지?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가던 산우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나를 따라 봉우리를 오른다. 그런데 따라가기 설정을 해 놓은 램블러가 길을 잘 못 들었다며 쉼 없이 울어댄다. 지도를 보니 저 아래 리본이 걸려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틀어야 했다고 나온다.
다시 길을 수정하여 능선길에서 벗어나 사면을 따라 내려가니 길게 쇠 울타리가 쳐져 있고 그 안쪽에는 굉장히 넓은 땅이 나타난다. 그 너른 땅 한 가운데 집 한 채가 서 있다. 그 집 울타리를 따라 한참 걸어가니 나무 계단이 있는 작은 쉼터가 나타난다. 불목재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진행방향으로 왼쪽으로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삼가 저수지로 가는 길이고 오른편으로 가면 정이품송으로 가는 길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갈목재에서 중도 탈출
불목재 나무 벤치에서 아이젠을 벗고 잠시 쉬고 있으니 산대장을 비롯한 여러 동료들이 뒤따라 내려온다. 이제까지 내려오면서 내가 뒤 꽁무니에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뒤에 있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위안이 된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다. 벌써 오후 세 시가 다 되어 가는데 남은 거리가 만만치 않다. 5시 10분에 산행 마감을 한다고 했으니 이제 겨우 두 시간 남짓 남았다.
이제는 정말 젖 먹던 힘을 짜 내야 한다. 뒤 팀이 잠시 쉬고 있는 동안 앞질러 나갔다. 길도 뚜렷하지 않은데 바닥을 보며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는 길을 찾아 걸었다. 내 뒤로 두 명이 따라 온다. 제법 높은 봉우리가 앞에 놓여 있어 부담스러웠는데 산길은 그 봉우리 앞에서 왼편으로 사면을 따라 나 있다. 그렇게 가더라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그렇게 조망 없이 지루하고 힘든 길을 얼마간 걷다 보니 산 길이 가파르게 내려가더니 도로가 나타난다. 갈목(葛目)재다. 이 고개 밑 땅 속으로 갈목 터널이 지나가고 갈목재 위를 지나는 옛길은 더 이상 관리도 되지 않고 지나가는 차량도 없다. 보수를 하지 않아 도로변 쇠울타리에는 흘러내린 흙 자갈이 수북이 쌓여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3시 40분이다. 램블러 기록을 살펴보니 여기까지 온 거리가 12 킬로미터이니 남은 거리가 약 6 킬로미터 정도 되는 것 같다. 1 시간 20분 만에 남은 6 킬로미터를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내 앞에 먼저 내려온 두 명의 산우님들도 어쩌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내 뒤를 따라 내려온 두 명의 산우님들은 여기서 산행을 포기하고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겠다고 한다.